책 제목이 우아하다.
제목부터가 뭔지 모르게 고상함을 풍긴다.
황보름 작가의 인생책이라 하여 과연 작가들은 어떤 책을 인생책이라 말할 수 있을까 궁금하여 펼쳐보게 되었다.
철학을 논하고 즐긴다는 프랑스란 나라의 작가답게 책에 녹여진 철학과 언어의 밀도가 으윽~~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힘든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초반의 능선을 넘는데 인내가 필요하단 말이다.
처음에 안갯속을 헤맨 이유는 일단 '나'라고 말하는 두 명의 여자가 번갈아 나온다는 걸 나중에 눈치챘다는 것과 심오한 철학노트를 만들어 세상의 온갖 철학적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풀어놓는 열두 살 꼬마 여자의 글을 해독하는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고 나면 작가의 플롯이 보이기 시작하고, 인물의 캐릭터가 보이고, 의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철학의 거적이 걷히는 소설 후반부터는 강물 위의 얼음조각처럼 빠르게 전개되어 이야기가 급물살을 탄다. 빵 웃음이 터지는 상황도 적절히 버무려져 있어 철학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못생긴 외모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50대 중반에 들어선 여성(르네)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직업은 특이하게도 부유한 아파트 수위. 그녀는 그녀만의 성(수위실)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탐닉한다. 그녀는 내면으로는 문학과 음악, 예술에 대한 취향을 품고, 외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걸맞게 무식함과 본데없음을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드러내길 선택한다.
어느 날 그녀는 부잣집 아들에게 버려진 언니의 죽음을 목도하며, 가난한 자가 부자의 것을 탐했을 때 이런 끔찍한 벌과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뼈저리게 몸서리치며 그녀는 자신의 지적 취향과 안목을 꽁꽁 숨긴 채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다른 지적 취향과 영혼의 빛남은 숨길 수 없었으니.
그녀만의 지적 취향과 고귀함을 알아챈 사람, 가쿠로 오즈.
그들은 둘 다 언어에 민감한 부류였고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달까. 거기에 주변 사람들보다 심오한 생각으로 자신의 세계를 은밀히 세워가는 어린 친구 팔로마까지.
르네는 가쿠로 오즈로 인해 이끼 위의 동백같은 찬란한 소통의 기쁨, 정신적, 지적 교류에서 오는 불꽃같이 강렬하고 짧은 행복 최고의 순간을 맛보게 된다. 누군가 나를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답게, 고귀하게, 따뜻하게 대해 주며 예술적, 정신적 교감이 이루어지는 환대를 받는다면 얼마나 기쁘고 황홀하겠는가?
그녀의 만찬은 영원히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르네는 평생 너무나 외롭고 힘든 가난과 세상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갇혀 살았다.
수위란 뭐 그렇고 그런거지, 가난한 자의 삶과 죽음은 한주먹거리의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싸늘한 시선 속에 살았지만 그녀가 홀로 구축한 은밀한 세계는 문학과 음악과 예술로 충만한 삶이었다. 자신의 내면이 이렇게 견고하고 단단한데도 그녀는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세상 사람들을 밀어내고 오랜 시간 고독을 견뎌야 했다.
그녀의 행복은 짧았고, 행복의 끝은 죽음으로 향해갔지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빛내준 친구들을 떠올리며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자신의 고귀한 영혼의 향기를 맡고 자신을 최고의 동백꽃으로 대해 준 오즈,
나이도 어리고 조건이 다른 상황에 있음에도 아름다운 영혼의 친구가 되어준 팔로마,
맛있는 차와 쿠키를 차려주며 허물없는 친구가 되어준, 파티에 초대받은 친구를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 준비해 준 마뉘엘라,
못생기고 별볼일 없다고 자신 없어하는 그녀를 품어주고 좋은 남편으로서 성실히 인생을 함께했던 남편 루시앵.
그녀에게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걸 일찍 깨달았어도 그렇게 세상 사람들을 향해 가시 돋친 모습으로 고독하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녀는 영리한 탓에 세상의 고정관념의 벽이 얼마나 철옹성처럼 견고한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징글징글한 가난, 정수리에 가난이 덕지덕지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고백처럼 가난은 사람들을 초라하게,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그녀는 비록 세상의 관념에 맞서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고귀한 취향과 품격을 지니고 비밀스럽게 그 취향을 즐겼다. 우리도 세상이 말하는 떠들썩한 부자가 아닐지라도 자신만의 고귀한 세계와 취향을 가졌다면, 그리고 그런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소울메이트를 만난다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섬/ 장그르니에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읽고 나니 장그르니에의 섬의 한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르네에게 핑계를 대자면 장그르니에란 작가가 말하듯 우리는 어떤 이들의 단면만 보고 판단할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다른 이면을 바라볼 시간과 여유와 관용이 없달까? 우리가 언제 그 사람 너머의 그쪽까지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에겐 다른 이에게 말하지 못할(않을), 보여주지 못할(않을) 한 면을 갖고 살아간다는 걸. 그래서 다른 감추고 싶은 부분까지 보여달라고 요구할 필요도, 섣불리 사람을 판단할 필요도 없다는 걸 생각해 보게 된다.
러시아어에 광활하게 펼쳐진 지평선을 마주하며 얻는 영혼을 채우는 감각을 일컫는 '프라스토르'란 단어가 있다고 한다. 인간은 영혼의 광활함 덕분에 좁은 공간에서라도, 예를 들어 훌륭한 책이나 영감을 일으키는 예술등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프라스토르'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르네는 좁은 수위실 안에서 자신만의 프라스토르를 만끽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어디에서든 프라스토르를 맞보고 이끼 위의 동백 같은 존재로 살 수 있다. 여기에 서로의 취향을 알아보고 나누고 연결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나름 행복할 인생이라 할만하겠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프라스토르를 누릴 수 있는 상황은 이 책에서 나오는 합창을 부르는 장면에서 연상되었다. 미움도 시기도 편 가르기도 누그러지고 하나가 되어 느끼는 감정의 합치와 희열. 함께 어울려 화음을 맞춰 노래 부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철학 수업 듣듯 어렵고 생소했지만, 재미의 포인트도 있고 의미심장한 인간 고찰(?) 내용도 있고, 가슴 뻐근하고 아릿한 슬픔도 맛볼 수 있는 다채로운 책이었다. 인간을 생존하려고 발버둥 치는 짐승, 영장류로 일갈하는 작가의 시선도 날카롭다. 아무튼 철학적인 내용이 버무려져 있어 읽기 쉽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읽고 나니 왠지 나도 우아한 고슴도치가 되어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과 혹시 주변에 있을 외로운 고슴도치들을 눈여겨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인상적인 문구:
따라서 이 모든 걸 잊으면 안 된다. 우린 늙을 것이고, 그건 아름답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 무엇이든 건설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 힘을 다해.
매일 자신을 초월하고, 하루하루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양로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자기 만의 에베레스트 산에 한 발씩 오르면, 그 한발한발이 조금은 영원한 것이 된다. 미래는 살아 있는 자들의 진정한 계획들로 현재를 건설하는데 쓰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음 그 자체도, 몇 살에 죽느냐도 아니라 죽는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다. 주인공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다 죽는다. 나에게 에베레스트 산은 지적인 메타포로 하겠다.
사실 우린 먹고, 자고, 새끼를 낳고, 영역을 차지하고, 그 안전을 도모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영장류다.
- 고슴도치의 우아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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